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2 AFC 아시안컵 일본 (문단 편집) == 그 외 == * 처음으로 대회를 유치한 일본은 아시안컵에서도 바로 첫 우승컵을 드는 겹경사를 누리게 됐다. * 일본은 1992년부터 [[J리그]]를 야심차게 창설하면서 일본 축구 역사상 최초의 황금세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고, 자국에서 개최한 아시안컵까지 우승하면서 크게 자신감을 얻었다. 그리고, 이 기세를 몰아 [[1994 FIFA 월드컵 미국|94 미국 월드컵]] 24강 본선 진출을 노렸다. [[도하의 기적|하지만, 경기 종료 1분 전 이라크에게 충격과 공포의 동점골을 한 방 얻어맞는 바람에 그만 아시아 예선 3위로 일본 축구 역사상 최초의 본선(24개국) 진출이 눈 앞에서 좌절되어버린다.]] 결국, 본선진출 실패로 인해 당시 일본의 아시안컵 첫 우승을 이끈 한스 오프트 감독은 감독직을 사퇴하게 된다. * 대한민국은 아시안컵 예선 6조에서 1승 1패를 기록, 2승을 기록한 태국에게 밀리며 최종 2위로 결국 본선에도 오르지 못하는 촌극을 맞봤는데, 당시 한국은 이 예선에 실업/대학 선수들로 구성된 사실상 2군 멤버들을 출전시켜 팬들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. 이걸 주도한 사람이 바로 [[허승표]]와 [[신문선]]이라고 알려져 있는데, 이 때문에 이들은 대한축구협회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고 한다.[* 이런 전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[[축구를 사랑하는 국민|축사국]]이라고 불리는 이 사태를 모르는 또는 알면서도 외면하는 일부 반축구협회 성향 축구팬들이 '이들도 피해자', '비주류 개혁가'로 칭송하는 바람에 상당히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.] 대부분 [[태국 쇼크]]하면 [[1998 방콕 아시안 게임]] 때의 충격패를 기억하지만, 이 예선전도 그 못지 않게 컸다. 당시 [[AFC]]도 분노하며 명색이 아시아 최고를 겨루는 대회 예선에서 또다시 이런 짓거리를 하면 월드컵 예선 실격같은 징계를 하겠다고 강력 경고하기까지 하게 되었고, 이게 독이 되었는지 이후로는 예선에서 [[2군]]에 해당되는 B팀을 따로 보내지 않게 되었다. * 북한은 첫 진출이었던 1980년 대회 이후 12년만에 본선에 다시 진출하였지만 1무 2패 조 최하위를 하고 최종 대회 8위로 쓸쓸히 대회를 마감하였다. * 모든 팀이 승점 1점 이상 얻었다. * 대회 최우수 선수는 일본의 신동으로 불리던 [[미우라 카즈요시]]가 차지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